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드워드 1세 (문단 편집) === 내정 === 왕세자 시절부터 대담한 활약을 보인 에드워드 1세는 왕위에 오른 이후 강력한 군주로 군림하였으며, 왕권을 강화하는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초석을 다지기 위해 이전의 왕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법률을 제정하였으며 덕분에 '잉글랜드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라는 별명도 얻을 정도였다. 기존의 관습법을 정비하여 국법의 불합리하던 점들을 해소시키기도 했지만 또한 법령을 통해 그때까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교회]]를 억눌렀으며[* 특히 성직자들이 세금을 교황청이 아닌 국왕에게 납부하도록 했고 명령을 거부한 교회는 재산을 압류하여 왕명을 지키도록 했다.] 영주들이 지닌 땅을 재분배함으로써 그 권력을 분산시켜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양모와 와인의 생산을 장려하여 국가의 재정을 확충시키는 등 잉글랜드의 중앙 집권화를 착실히 이루어 나갔다. 사실상 잉글랜드 봉건 제도의 종말을 알린 왕으로, 봉건시대 유럽에서 강력한 권력을 누리던 영주들과 교회를 끝없이 견제하고 약화시켰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물론 봉건제는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지만. 또한 노르만 귀족 계급과 앵글로색슨족 평민 계급을 하나로 뭉쳐 단결력을 높이기 위한 취지에서 의회를 운영함에 있어서도 제법 공을 많이 들였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 [[프랑스어]]를 사용했던 잉글랜드의 귀족과 왕족들에게 [[영어]]의 사용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비록 태자 시절에 꺾었던 정적 시몽 드 몽포르를 증오하기는 했지만 그의 의회 운영법만큼은 적극적으로 참고했으며 문화적, 정치적으로 상하 정치 계급의 화합을 이루어 강력한 결속력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했다. 특히 의회를 통해 지속적인 과세징수를 추구했는데, 특히 1295년에 연 모범의회에서는 다수의 귀족, 모든 주교와 대주교, 각 주에서 기사 2명, 소도시들에서 대표 2명이 참석하는 등 광범위한 지역과 계층에서 대표를 보내도록 하여, 중앙통치에 도움이 되도록 의회의 권위를 높혔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를 통해 후에 있을 하원, 상원 체제 역시 어느 정도 구축했다. 오늘날 오랜 의회 전통으로 유명한 영국의 의회정치는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